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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서두를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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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문화

고린도전서 서두를 읽으며

고린도 교회부터 현대 교회까지 변하지 않는 ‘구별된 삶’의 가치

종교개혁 502주년 기념 성경교육

 

고린도서-사진.jpg

 

고린도전서는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주후 53-55년 경에 기록하였다. 오래 전에 쓰여졌지만 고린도전서는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오늘 우리에게 도전과 감동을 주는 주옥같은 말씀을 담고 있다. 고린도전도의 서두가 주는 몇 가지 가르침에 주목해보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고린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소스데네

 

헬라 편지의 정형화된 형식에 따라 바울은 11절에서 먼저 편지를 보내는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2절에서는 받는 사람을 밝힌다. ‘바울과 소스데네.’ 이들이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바울이지만 바울은 소스데네를 공동발신자로 표시한다. 소스데네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을 보면 그는 고린도교회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인물로서 사도행전에서 고린도의 회당장으로 언급된 소스데네와 동일인물인 것으로 보인다(18:17).

바울은 주후 50년경 고린도를 처음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당시 바울은 몹시 두려움과 약함과 떨림에 사로잡혔다(고전 2:3).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행정중심지로서 올림픽 경기(Olympic games)에 버금가는 이스트미안 경기(Isthmian games)2년에 한번 개회되는 활기찬 도시였고 아프로디테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우상을 섬기며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대한 종교, 제도와 문화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했던 바울은 위축되었을 것이고 반대자들의 물리적 핍박도 받았다. 두려움과 떨림은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혼자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18:9-10)고 힘을 주셨다. 바울 곁에는 신실한 동역자들도 있었다.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16:4) 부부가 그들이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복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 증거했다. 인간의 지혜와 화술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만을 의지했다(고전 2:1-2). 그 결과 디도 유스도가 회개하고 회당장 그리스보와 온 가족이 구원을받았으며 수 많은 고린도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1에 등장하는 소스데네도 구원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소스데네를 형제라고 부른다. 유대교의 회당장이었던 소스데네가 회당장 그리스보처럼 예수를 믿고 유대교를 떠나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칼빈은 소스데네가 형제라고 불리고 있는 점을 주목하면서 그가 사도 바울에 의해 형제라고 불리게 된 것은 회당장의 명예보다 더 큰 영광이라고 평가했다. 유대교의 회당장이 아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같은 아버지로 부르는 바울의 형제가 된 소스데네가 이제 바울과 함께 편지하며 고린도교회에 문안 인사를 전한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 소개한다(고전 1:1). 다메섹으로 교회를 핍박하러 가던 중에 바울은 강권적인 부르심을 받았다. 여기서의 부르심은 특별히 사명으로의 부르심을 나타낸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주님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실 뿐 아니라 사명으로 부르신다. 자신을 사명의 자리로 부르신 것을 깨닫고 충성스럽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가 어디에 있든 최선을 다해 부름 받은 일에 임할 때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자신감을 가지며 사역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바울 자신이 주도권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뜻이 아닌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사람을 부르셔서 그 분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부르심을 받는 것이 은혜이고 쓰임 받는 것이 축복이다. 일할 수 있도록 부르시고 건강도 주시고 물질과 시간과 기회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사람들을 불러 위대한 일을 이루어가신다. 부르심이 자신의 의지나 결단 이전에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알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에 대해 교만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 내가 있음을 깨닫는 성도는 결코 교만과 자랑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도가 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교만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라고 칼빈이 주석한 것은 정당하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부르심의 시초부터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성도는 잊지 말아야 한다.

고린도전서의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이다(1:2). 고린도교회는 분쟁이 있는 교회였다. 수신자를 밝히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분명히 한다. 고린도 교회는 아볼로나 게바의 교회가 아니며 하나님의 교회이다. 교회라는 말의 헬라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α)70인역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신약에서 에클레시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 이스라엘,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좀 더 풀어 설명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이 성도라면 성도와 거룩은 분리될 수 없다. 거룩한 삶은 성도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성도라는 말은 하기오스(ἅγιος)인데, 그 자체로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뜻이 있다.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그들이 거룩한 성도의 무리임을 일깨운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혼합적 이방종교와 성적 부도덕이 만연한 고린도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요구된다.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존재라는 정체성은 고린도성도와 오늘의 성도에게 동일하게 긴요한 것이다.

 

고린도서-인물.jpg

 

김 현 광

 

한국성서대학교 대학원장,

신약학 교수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

CalvinTheologicalSeminary,

신약학 Th.MThe SouthernBaptistTheologicalSeminary,

신약학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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